계획 및 구상
사고력 훈련 우리는 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종이로 나오는 글 뿐 아니라 온라인으로 쏟아지는 글까지 그 양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매일 쏟아져 나오는 글 중에는 흥미롭기도 하고 읽어서 도움이 될 만한 글도 적지 않지만, 독자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글들도 많다. 누구나 잠깐 생각해도 생각해 낼 수 있는 내용으로만 채워진 상투적이고 진부한 글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한다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
진부함의 상대개념으로 창의성을 들 수 있다. 창의성이라는 것을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넓게 잡아 ‘남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이라고 해 보자. 남들과는 다른 시각이 있거나, 남다른 사고의 깊이가 있거나, 남을 움직일 만한 차분한 표현력이 있으면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창의적이라야 독자의 관심을 끌고,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 심상히 넘겼던 것을 다시 바라보아 새로운 의미를 읽으며 참신하게 표현해 내는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 문명에 잘 대처해 나갈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기존의 상식, 고정관념을 넘거나 깨어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고정관념 벗어나기
마음속에 굳어 있어 변하지 않는 생각을 고정관념이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있기도 하고, 사회 집단 차원에서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으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인의 눈에는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나의 ‘당연’을 의심하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조차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며, 상식과 통념에서 벗어나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기존 지식 직접 확인하기
고정관념은 선천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견문이나 학습에 의해 형성된다. 인간의 결함이나 착각에 의해 고정관념이 생기기도 하고, 같은 공동체에 있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생각에 의해 생기기도 하며, 미디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기기도 한다. 이것을 인식하고 걷어내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할 때 세계를 좀 더 올바로 볼 수 있으며, 남들과는 다른 사고를 할 수 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들에 대해 스스로 다시 확인해 보는 태도를 가지면 고정관념의 폐단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다. 기존 지식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관습적 차용 인식하기
생활이 오래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굳어지면 고정관념이 된다. 습관이란 ‘같은 상황에서 반복된 행동이 일상화 된 것’을 말한다. 습관은 너무도 익숙해져 별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다음 질문에 답해 보라. “무지개는 무슨 색인가?”
관습적으로 굳어진 지식이나 상식은 일상에서 매우 흔하다. 우리는 흔히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깔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지개 색깔은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비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쇼나족은 무지개를 분홍, 진홍, 주홍, 빨강 네 가지 색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또 리베리아의 바싸족은 무지개의 색을 딱 두 가지로 보았다. 19세기 독일에서도 무지개는 주황색과 보라색을 제외한 다섯 가지 색깔이었다. 조선시대 무지개 그림 또한 적색, 황색, 청색, 흑색, 흰색 다섯 가지였다. 이 외에도 천사의 옷은 흰색, 악마의 옷은 검은색으로 입히는 것, 숫자 4는 불길하다고 여기는 것 등도 관습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이데올로기적 왜곡 인식하기
사회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개인은 없다. 주체가 아무리 올바른 감각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세계가 거짓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어 있으면 참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고정 관념을 갖게 된다. 어떤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먼저 노출되었느냐에 따라 인간은 크고 작은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책 등 온갖 미디어와 문자 속에는 지배층이 만들어낸 허위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배짱이 우화를 생각해 보자.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토끼가 방심하는 사이 거북이가 경주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이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개미는 부지런히 일을 하고 베짱이는 빈둥빈둥 놀기만 하다가 겨울이 닥치자 베짱이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이다. 두 우화는 과거 교과서에 꾸준히 실려, 사람들은 토끼는 잔꾀가 많고 거북이는 우직하며 개미는 부지런하고 베짱이는 게으르다는 교훈을 드러내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두 우화는 성장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는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성실하고 근면하기만 하면 어려운 난관을 뚫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했다는 우화는 ‘모두가 평등하니 무조건 열심히 하면 이기고 성공할 수 있다는 의식을 고취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숨기고 있다. 물에 적합한 특성을 가진 거북이에게 뭍이라는 환경을 주면서 토끼와 똑같은 거리를 달리라고 했다. 거북이는 바다에 사는 동물이므로 육지에서 토끼와 경주하면 지는 것이 당연하다. 애초에 가진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환경의 문제를 묻어둔 채 오직 ‘근면’만을 주입하여 성장 제일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던 것이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도 사회의 여러 갈등 요소를 무시한 채 근면만을 강조함으로써 비판 의식을 억제하고 근면을 고취시키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개미 하면 무조건 근면을 떠올리고 베짱이 하면 게으름을 떠올린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일하는 개미는 전체 개미의 20퍼센트에 불과하며 전체의 50퍼센트는 일하지 않는다고 한다.이런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인식하고, 이를 깨뜨리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할 때 우리는 내가 가진 생각의 한계를 깨뜨릴 수 있으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나와 사물을 자유롭게 해주는 열린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감각기관의 불완전성 인정하기
인간은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 생각하고 믿지만 인간의 인식 체계와 감각기관은 완벽하지 않다. 인간의 뇌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을 경험할 때 그에 해당하는 정보를 전부 수용하지는 못한다. 많은 정보가 걸러지거나 버려지며, 바로 이때 인간은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간은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 다른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갖는 한계를 자각하고 열린 사고를 갖는 훈련을 기르는 것이 좋다.
처음 본 것, 생각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것의 반대는 무엇인가?”, “이것이 다른 것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은가?” 등을 물으며 동시에 존재하는 여러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두 개 이상의 대립적인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미지를 동시에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사고를 ‘야누스의 사고’라고 한다. 이런 야누스적 사고를 함으로써 창의적인 글을 쓸 수 있다.
이와 같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감각기관의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물은 어디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 하나의 사물 안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사물을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다양한 각도,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볼 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나의 시각, 한 가지 관점만을 붙들지 말고 열린 시각, 열린 마음으로 보는 창의적인 사고를 길러야 한다.
상식에 의문 제기하기
관습적인 생각이나 상투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상식을 뒤집을 때 독창적인 생각, 참신하고 새로운 표현을 할 수 있다. 상식을 뒤집어 말하면 ‘식상’이다. 글쓰기에서 상식이란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 진부하고 식상한 고정관념을 포함한다.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거기에 감춰진 의미를 읽어 낼 수 있으려면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동일한 사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상식에 의문을 제기해 보라.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은 일상적이고 피상적인 관찰을 거부하고, 그 안에 잠재된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때 비로소 사물은 자신의 비밀을 열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출처: 한양대학교 교양국어교육위원회, 『글이 삶이다』, 한양대학교 출판부, 2017, 19~25쪽.